청나라 원세개 청나라의 총리대신, 중화민국의 대총통을 거쳐 스스로 중화제국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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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 명성황후 생가인 명상황후(明相皇 、) 1863년 12월 조선의 제25대왕 철종(鐵宗) 이후 죽음도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마을 수가 먼 혈족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이 12세에 26대왕 고종에 즉위합니다.

이후 10년간 대원군이 집정으로 정권을 장악했으나 1873년 11월에는 명성황후의 공작으로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 고종이 친정을 선포합니다.

이때부터 황후 민씨를 등에 업은 민씨 일가의 판도정치가 시작됩니다.

민씨 세력은 온갖 핵심 관직을 장악하고 권력을 휘둘렀으나 백성들을 수탈하는 등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국장은 텅 비어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지고 있습니다.

그중 임오년인 1882년 6월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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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 1875년 운양호 사건으로 일본과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고 새로운 근대 문물을 접하게 되지만 1881년에는 일본의 도움으로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합니다.

그런데 별도 표기군이 제대로 대접받는 반면 기존 구식 군대인 무위영과 장어영 군졸은 13개월간 봉급미조차 받지 못해 불만이 폭발할 정도로 커집니다.

그러다가 겨우 한 달치 월급을 받게 되었는데, 민씨 집이 책임관으로 있던 선혜청의 연기로 양도 모자란 쌀 반, 모래 반의 월급 쌀을 받아 군사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백성들이 힘을 합쳐 흥선대원군이 개입하면서 임오군란은 민씨 및 일본 배척운동으로 번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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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식 무기로 무장한 별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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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6대 왕 고종 군민의 공격으로 일본 공사관이 불에 타 13명의 일본인이 죽었는데 일본 공관 직원들은 모두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달아납니다.

망설이지 않고 궁궐 안까지 진격한 군민들은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에도 난입했지만 명성황후는 이미 도망쳤습니다.

긴박한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불러 사태를 수습하게 하고 사태를 수습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되는데 곧 민씨 일가의 요청으로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이후 조선의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이후 청나라 총리대신, 중화민국의 대총통을 거쳐 스스로 중화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르는 ‘원세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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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와 어머니 유씨 원세개는 1859년 9월 16일 허난 성 항성 최고의 명문가이자 권세가 집안에서 원보중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없었던 원보중의 동생 원보경의 집으로 입양됩니다.

귀한 자식을 얻은 원보경은 원세개를 소중히 키웠는데, 6세부터는 유명한 선생님을 모시고 사서오경을 가르치고, 제남, 난징 등 여러 도시를 함께 여행하며 세상을 보는 눈도 키워주었습니다.

하지만 원세개는 책 읽는 공부보다는 말타기, 활쏘기 등 무예와 병법에 관심이 많아 만인적이 되겠다는 꿈을 키워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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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 성 항성의 원세개 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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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의 당숙 원보한 1873년 여름에는 양아버지 원보경이 세상을 떠나지만, 이후 간섭하는 사람도 없어 빈둥빈둥 노는 원세개를 볼 수 없었던 당숙 원보한이 원세개를 베이징으로 불러들여 강하게 공부시킵니다.

이때부터 원세개는 4년 정도 베이징에서 공부를 하는데 이 기간은 그의 학문적 성취에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1876년 가을에는 원보항의 명으로 향시를 치렀으나 낙방하여 10월에는 17세에 결혼합니다.

1879년 가을 원세계는 다시 한번 향추를 응시하는 데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자 원세개는 “큰 부자는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하는데 왜 붓과 벼루 속에 묻혀 세월을 헛되이 보내나?”라며 공부하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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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군장수 오장경, 그러나 시골에서 토착지주로 살아갈 수는 없었던 원세개는 1881년 10월 양아버지와 매우 친한 사이였던 이홍장의 수하장수 오장경의 부름으로 산둥성 등주로 갑니다.

그리고 등주에 상주하던 오장 6시 중 회군부대 영무처(행정업무조직)에서 일하게 되는데 평소 놀기를 좋아하고 오만한 귀족 같은 모습과는 달리 모든 것을 규율에 따라 엄중하고 소신 있게 처리하면서 오장 6시 중의 큰 신임을 얻게 됩니다.

과거를 그만둔다고 했는데 등주에서 근무하면서도 과거 공부를 계속했는데 1882년이 향년으로 가을에 향년을 응시하려고 계획하다가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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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에 새겨진 원세 당숙원보항의 석각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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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에 억류되어 있던 흥선대원군 1882년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나 민씨 세력의 요청을 받은 청조 조정에서는 오장경의 부대를 출병시켰습니다.

조선에 도착한 원세개는 청군의 선봉에 서서 조선 군민을 진압하고 임오군란의 배후 흥선대원군을 납치해 천진 압송하는 일까지 성공적으로 수행해 오장경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북양 대신 이홍장에게도 보고됩니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청나라가 조선과 일본 간의 갈등을 중재해 줄 것으로 여겨 청군의 요청으로 남대문 밖 청군 진영을 찾았지만 이곳에서 바로 억류되었다가 8월 26일에는 천진으로 압송됩니다.

대원군이 재집권한 지 33일 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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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이후 오장경의 청군은 조선에 주둔하고 조선의 병권 재정권 외교권까지 장악하려는 등 내정간섭에 나섰고 23세의 원세개는 조선군무 신분으로 조선의 신식군대훈련을 돕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성실하고 명철한 일처리로 호평을 받으며 조선의 사대부들과도 인연을 맺습니다.

1884년 12월 4일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가 우정총국 개국을 축는 축하회에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고종과 명성황후는 200여명의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개화파에 의해 창덕궁에 억류됩니다.

그러자 원세개는 청조의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12월 6일 창덕궁을 공격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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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이 시작된 서울 종로 우정총국(우정총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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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장 12월 6일 오후 1,500여명의 청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200명의 군사로는 대응하지 못했던 일본군은 철수하고 상황이 급반전하자 김옥균 등 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하고 갑신정변은 3일 천하에서 끝납니다.

이렇게 원세개는 고종을 구원한 공을 세웠고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이어갑니다.

이 일로 원세개는 이홍장의 눈에 크게 들어오게 됐지만 주변에서는 “무턱대고 군사를 움직여 멋대로 참견한다”는 등 비난도 받습니다.

그리고 1885년 초 원세계는 귀국하지만 주변의 질시를 의식해 조용히 엎드려 지냅니다.

1885년 10월에는 청나라에 억류돼 있던 흥선대원군이 3년 2개월 만에 귀국합니다.

명성황후 하고 민씨 세력이 러시아와 손을 잡으려 하자 대원군을 앞세워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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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 그리고 원세개도 대원군을 호송할 책임을 지고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는데 그동안 조선에서 원세개의 공적을 인정한 이홍장의 명으로 교섭통상대신, 감국대신의 직무를 맡아 한양에 상주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원세개는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조율하고 간섭하는 등 마치 조선의 실권자 같은 위세를 떨칩니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불만을 살 뿐만 아니라 청조 조정에서도 잘못을 지적하는 보고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홍장 입장에서는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을 강하게 키우면서 일본과 러시아 세력의 침투를 막고 있는 왕세개가 누구보다 일을 잘함으로써 비난을 무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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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남 15녀 중 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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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라 대신 위안부카이’ 원세개는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도피하듯 청나라로 돌아가는데, 1882년부터 시작된 12년여의 조선생활은 그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시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그의 관직생활은 조선에서 시작되었고, 그 시기 또한 많은 것을 배우는 23세에서 35세까지의 청년기였습니다.

훗날 원세개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인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라고 평가받기도 하지만 실제로 윗사람에게는 칭찬을 많이 받았지만 주변이나 상대에게는 비난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조선의 사대부들과 외국 공관원들을 많이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생존술과 처세술을 익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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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건육군 창설 시 원세 개국 후 청일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후방 보급업무를 담당했던 원세개는 개화된 일본군의 공격에 무너져 내리는 청군을 보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따라서 원세개는 모병제 도입과 신식군대 편성을 통한 군 개혁을 황제로 상주하였으나 1895년 12월에는 이에 동조하는 대신의 도움으로 광서제 승인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원세케는 톈진에서 신건 육군의 양성을 시작하는데, 이것이 원세케의 정계 진출과 독자적인 세력 구축의 출발점이 됩니다.

왕세게는 독일군을 벤치마킹했지만 독일 장교 10명을 교관으로 초빙해 신무기를 들여오는 등 서양의 선진 군사기술을 과감히 도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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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건 육군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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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에게 충성을 다하는 군대보다 오합지졸 군대의 군기를 세우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지만 원세개는 참률 18조를 도입해 순식간에 군기를 듭니다.

전쟁터에서 외면하는 사람, 행군으로 낙오하는 사람, 계파를 조성하는 사람 등 18개 조항에 해당하는 사람은 무조건 목을 비틀도록 한 것인데 외신에서는 왕새개는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 군대의 결점을 단시간에 고친 이 시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군사개혁가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급여도 받지 못하는 이전의 군대와 달리 급여를 제대로 지급하는 등 복리를 잘 마련하면서 충성을 다하도록 정신교육을 시켰는데, 그 결과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병사가 아닌 왕새개에게 충성을 다하는 병사가 만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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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11대 황제 광서제 1898년 6월에는 광서제가 강유위 등 개혁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근대화 운동인 변법자강 운동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에 동조하던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수구파 세력의 반발이 일어났고 그래도 광서제가 개혁을 계속 추진하자 수구파는 쿠데타 계획까지 세웁니다.

그러자 개혁파는 당시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던 원세개를 포섭하여 이에 대응하려 하였으나 협력하는 것처럼 보였던 원세개가 등을 돌리고 밀고하면서 변법자강운동은 100일 천하에서 끝났고 광서제는 서태후에 의해 유폐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원세개는 서태후의 큰 신임을 얻게 되는데, 한편 원세개가 한간(매국노)으로 평가받는 출발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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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순무원세개, 이렇게 서태후의 신임을 얻은 원세개는 1899년에는 산동순무(지방장관)로 승진하게 됩니다.

1900년에는 외세를 몰아내려는 의화단 운동이 심화되었고, 이로 인해 8개국 연합군의 베이징 침공이 벌어지는데, 원세개는 반란을 진압하고 외국인을 보호하는 등산동 지역을 안정시켜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됩니다.

1901년 11월 이홍장이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원세개가 그의 보직을 이어받아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이 되었습니다.

이후 원세개는 막강한 북양군을 만드는 등 홍장 때보다 큰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1907년까지 북양대신으로 일하는 동안 많은 정치적 활동의 성과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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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로 끝난 변법자강운동(무술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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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산둥성 지난시의 산둥대학교 정문 1903년부터 군대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여 각종 제도개혁을 통해 군을 쇄신하고 근대화된 최초의 중국 경찰제도 도입합니다.

경제적으로는 농업, 상업, 공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면서 특히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는데 기간 중 밀가루공장, 제지공장, 채탄기업 등 많은 근대화된 공장들이 들어설 것입니다.

또 은행 설립, 화폐제도 개혁 등 금융 근대화를 추진하고 최초의 중국 국립은행도 문을 열 것입니다.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1901년에는 오늘날 산동대학교 전신인 산동대학당을 설립하는 등 신교육 시스템 구축에도 많은 힘을 쏟고 거리에는 가로등이 세워져 전철이 다니는 변화도 낳습니다.

또한 중국의 고질적인 병폐인 마약과 도박을 금지하는 개혁도 추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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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산동대학당 입학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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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통제부의원과 순친왕 1908년 1월 미국 신문에 원 3개의 사진과 함께 기사가 실렸는데 “매일 오전 5시에 일을 시작해 밤 9시까지 일하고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하루도 쉴 날이 없는 사람”이라고 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활약은 어른들에게는 칭찬받을 만한 일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기를 사게 되고, 특히 북양에서 세 세력이 커지는 것이 그들에게 큰 위협이 되어 1907년에는 외무상서, 군부대신으로 전보되어 북경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1908년 11월 광서제와 서태후가 잇따라 세상을 떠나고 어린 아버지의가 선통제로 즉위하면서 아버지의 아버지인 순친왕의 섭정이 시작되면서 원세개는 벼슬에서 해임되고 모든 것을 잃고 낙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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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향 후 태공처럼 시간을 보내는 왕새개(19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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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대신의 원세개 1911년 10월 10일 우창 봉기를 시작으로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인 ‘신해혁명’이 일어납니다.

조정에서는 당시 가장 강력한 군대였던 북양군을 동원해 진압하려 했으나 북양군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북양군은 황제를 위한 군대가 아니라 원세개에게 충성을 다하는 군대였고 비록 원세개가 조정에서 쫓겨났지만 여전히 원세개에게 충성을 다하는 군대였던 것입니다.

어쩔 수 없었던 조정에서는 원세개를 다시 불러 11월 1일에 원세개가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무한 3진(무창, 한양, 한구) 중 한양과 한구를 공격하여 중수하고 무창의 혁명군을 압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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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1대 임시대총통 쑨원 그러나 12월 2일 열린 혁명군 회의에서 원세개가 청조를 무너뜨리고 혁명군에 합류하면 원세개를 대총통으로 추대하겠다고 결의했고 원세개는 공격을 멈추고 혁명군과 협상을 벌입니다.

그러나 양측의 의견 일치가 쉽지 않았지만 결국 12월 29일 유럽에서 귀국한 쑨원이 임시 대총통에 선출됩니다.

1912년 1월 1일에는 쑨원이 난징에서 아시아 최초로 공화국 중화민국의 건국을 선언합니다.

그러자 화가 난 원세계는 우창에 대한 공격을 재개합니다.

중화민국을 건국했지만 군사도 자금도 없는 상태에서 원 3개의 북양군에 대응할 능력도 되지 못했던 쑨원은 원 3개와 협상을 재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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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신해혁명, 무창봉기기념관과 손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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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 그리고 ‘황제를 퇴위시키고 청나라의 문을 닫을 테니 대총통 자리를 내놓으라’는 왕세개의 요구와 ‘공화정 체제를 도입해 수도를 난징으로 옮기라’는 손문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협상이 타결됩니다.

이후 원세개는 청조를 계속 압박했고 결국 청조는 공화정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1912년 2월 12일 청나라 조정 마지막 조회가 열리고 공화정 도입을 위해 황실의 통치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을 담은 마지막 황제부의 퇴위조서가 발표되면서 286년간 중국을 통치한 만주족 청나라는 공식적으로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3월 10일, 원세개가 중화민국의 2대 임시대총통에 취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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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의 원세개, 그러나 자신의 요구조건을 모두 얻은 원세개였지만 쑨원의 요구조건은 하나도 들어주지 않고 나라의 주인이 된 원세개는 자신의 군사력을 이용해 독재정치를 벌이다 오히려 혁명파 사람들은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청나라는 멸망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황제가 원세개로 바뀐 것 외에는 변함이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에 손문은 혁명파 세력을 재정비하여 국민당을 창당하고 원세개의 독재정권에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국민당의 결사항전은 두 달 만에 실패로 끝나고 원세개는 1913년 10월 정식으로 초대 총통에 취임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0일에는 중화민국 국회를 해산시키고 자신만의 독재체제까지 구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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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계 임시대총통 취임 후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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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개조 관련 언론보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일본도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으로 참전합니다.

그리고 독일의 조차지였던 산둥성 일대를 점령한 일본이 1915년 1월에는 왕세게에게 자신의 권익 확대를 위한 요구사항 21개를 내밀어 합의를 요구합니다.

21개조에는 산동지역 조차, 남만주지역 조차, 모든 외교활동에 일본의 사전승인 등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으나, 4개월에 걸쳐 교섭이 진행된 끝에 결국 5월 9일, 원세개편은 이를 수용할 것을 통보합니다.

이로 인해 원세개는 다시 나라를 판 한간으로 비난받았고, 5월 9일은 근대 중국의 3대 국치일 중 하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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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와 21조, 특히 황제가 되고 싶었던 원세개가 일본의 도움을 받아 황제가 되고자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더 큰 비난의 이유였지만 현대에 와서는 5·9 국치가 전적으로 원세개의 책임이냐는 점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있는 것 같습니다.

청일전쟁 패배 후 상대도 안 되는 실력으로 일본과 전쟁을 할 수도 없었고, 시간을 벌면서 미국과 유럽 열강의 도움을 받고자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중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는 이야기가 황제가 되기 위해 일본에 협력했다는 비난은 공화정을 주창한 손문 등 반대 세력이 원세개를 음습하게 공격하기 위해 만든 이야기라는 것인데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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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개조 협상 중일 양국 대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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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왕세개는 어쨌든 정식 대총통이 되고 독재체제를 구축한 왕세개는 황제가 되겠다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리고 1915년 12월 11일에는 국가체제를 논한다는 이유로 회의를 소집하여 황제로 추대되었고, 12월 12일에는 중화제국의 건국을 선언합니다.

12월 20일에는 옛날 황제 즉위 때 행해진 하늘에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면 12월 23일에는 윈난의 군벌 채악, 탕계요 등이 24시간 안에 제정을 취소하지 않으면 토벌에 나서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내옵니다.

그리고 원세개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12월 25일에는 윈난성의 독립을 선언하여 전쟁이 일어나고 전국 각지의 군벌들이 이에 참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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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시보의 사실 원세의 황제가 되겠다고 했을 때 단기서, 풍국장 등 오랜 측근들은 거의 결사반대를 했지만 원세개가 그들을 쫓아내고 나중에는 황제 즉위에 찬성하는 간신들만 곁에 남게 되고 그들은 하루빨리 황제가 되라고 아부만 합니다.

그래도 원세개는 신문을 보면서 민심을 읽고 있었지만 신문들은 모두 어용으로 제정 복귀에 반대하는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건이 하나 일어납니다.

당시 발간되는 중국 신문 중에 일본 외무성이 지원하는 순천시보가 있었는데, 원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던 순천시보에서는 원세개가 황제가 되는 것에 반대하는 민심을 제대로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청나라 원세개 청나라의 총리대신, 중화민국의 대총통을 거쳐 스스로 중화제국의 황제 38

황제가 되고 싶었던 원세 개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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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의 장남 원국정 원세개도 순천시보를 가끔 읽었는데, 자신이 왕세자가 되고 싶었던 원세개의 장남 원국정이 원세개만을 위한 위조 신문을 만들어 원세개의 눈을 가립니다.

그러던 중 원세 셋째 딸 숙정이 하녀에게 잠두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는데 콩을 가져온 종이가 순천시보였습니다.

그리고 콩을 싼 순천시보와 집에서 보던 순천시보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숙정이 이를 왕새개에게 알리면서 왕새개도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후 원세개가 믿었던 안후이, 장쑤, 저장 지역의 군벌들도 반대편에 서는 등 황제 즉위에 반대하는 세력이 점점 커졌고, 12월 31일 연호를 홍헌으로 즉위한 원세개는 결국 이듬해 3월 22일 황제 즉위를 취소하고 중화민국 대총통으로 복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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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림의 원세개, 그러나 이미 민심은 떠나버렸고 나라의 안정을 위해 자신이 임시로라도 대총통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답을 얻기 위해 각 성 대표를 불러 회의를 했는데 모두가 원세개의 하야를 요구합니다.

깊은 실망감 속에 분노를 이기지 못한 원세개는 결국 쓰러져 눕게 되지만 1916년 6월 6일 뤼위안훙에게 대총통 자리를 양보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급사합니다.

그래도 더 이상 거칠게 하지 않고 스스로 물러난 탓인지 6월 28일 치러진 장례식은 전국에 관청의 조기가 내걸리는 등 황제의 예우를 받으며 성대하게 치러졌는데 오늘날 하남성 안양시의 원림이 원세 무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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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 무덤, 원림(原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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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제국 원년에 만들어진 원세개 금폐 등 다양한 모습으로 57년간 살아온 원세개는 오늘날 군사를 다스리는 능력이 뛰어나 실무에 능하고 모든 일에 숙련되게 대처하는 훌륭한 신하이자 중국의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 다방면에서 근대화를 적극 추진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나 결국 개인의 욕심으로 나라를 배신하고 나라를 훔친 대도로 평가받고 있습니다.